시작하며
19세기, 조선과 일본은 모두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선택한 방향은 극명히 달랐다. 조선은 문을 걸어 잠갔고, 일본은 문을 열고 서양을 공부했다. 왜 일본은 빠르게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해, 조선과 일본의 결정적 차이를 살펴본다.
1. 일본은 어떻게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나
조선이 19세기 내내 외세의 압력과 내부 혼란에 시달릴 때, 일본은 스스로 체제를 개혁해나가며 근대 국가로 탈바꿈했다. 단순한 서양 모방이 아닌,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해법을 찾아낸 과정이었다.
(1) 외래 사상을 받아들이는 방식부터 달랐다
일본의 주자학 수용은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조선은 주자학을 국교 수준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정치·사회제도를 유교 논리로 재편했다. 반면 일본은 주자학을 도구로 인식했다.
📑 일본의 유학 수용 태도 차이
- 조선: 주자학을 절대 진리로 수용, 비판적 시각 부재
- 일본: 학문은 배우되, 실용과 현실에 맞춰 해석
- 대표 일화: 야마자키 안사이는 “공자, 맹자가 침략해도 싸워야 한다”고 가르침
이처럼 일본은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자국 중심적 해석을 유지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2) 국학의 등장과 중국 경전의 상대화
에도 시대에 일본 내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국학은, 일본 고유의 정체성을 찾자는 움직임이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은 중국 고전을 읽는 이유를 “일본 고서를 읽기 위한 도구”로 한정지었다.
이는 단순히 외세를 배척하는 관점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 방식이 체계화되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 서양과의 접촉: 개항 이후 놀라운 적응력
1853년 페리 제독의 방문 이후 일본은 급속히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속도는 단순한 강요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축적된 내부 인식과 준비된 태도의 결과였다.
(1) 군사·외교 전문가들의 선견지명
사쿠마 쇼잔 같은 인물은 서양과의 충돌을 예상하고 해양 방어, 서양식 병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무조건 싸우자는 보수파의 주장”을 경계하며,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경고했다.
(2) 간닌 마루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례
간닌 마루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온 일본 청년 중 한 명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다. 그는 문명개화론을 제창하며, 서양을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자기화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3. 메이지유신: 일본판 혁명, 그러나 전쟁 없는 혁명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조선의 갑신정변보다 20년 빠르게, 일본은 봉건제를 해체하고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를 세운다.
📑 메이지 유신의 핵심 변화
- 250여 개 번(藩)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
- 쇼군 중심 체제를 천황 중심 체제로 전환
- 다이묘들의 자발적 권한 반납: 전쟁 없이 이루어진 통합
- 내각제, 징병제, 세제 개혁, 산업 육성 등 서양식 개혁 전면 시행
이 과정에서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을 돌며 국가 시스템을 연구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4. 조선이 일본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
그렇다면 쇄국 중이던 조선은 어떻게 일본의 변화를 인지하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한 스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 부산에 세워진 동본원사와 ‘이동인’의 등장
부산에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신이 건립한 동본원사에서 조선의 승려 ‘이동인’이 일본의 불경과 문물을 접한다. 그곳에서 사진, 책,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은 이동인은 서울로 돌아가 김옥균, 서재필 등을 만나게 된다.
(2) 개화파의 온상이 된 봉원사
서재필은 이동인에게 받은 책과 사진들을 1년 넘게 연구하며 세계 정세를 깨달았고, “우리도 국민 권리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이동인의 역할로 본 개화의 시작
- 이동인: 불교 승려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 지식인 연결자
- 일본 문물과 국제정세를 접목해 김옥균 등에게 전달
- 금괴를 받아 밀항, 일본에서 유학 후 도쿄 외교 인맥과 연결
- 이후 신사유람단 출범의 기틀 제공
이동인은 이후 암살당하지만, 그가 남긴 정보는 조선 개화파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5. 일본은 준비했고, 조선은 눈을 떴다
1870~1880년대 조선 개화파는 일본을 통해 처음으로 세계의 변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군대, 교육, 산업, 정치 개혁을 완료해가고 있었다.
📑 조선이 본 일본 근대화의 핵심 요소
- 7년 만에 초등학교 2만 개 설립
- 징병제 도입으로 사무라이 해체, 국민 군 창설
- 내각제·매이지 헌법·산업정책·철도 개발 등 서양식 제도 이식
-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 등 차세대 리더 양성
조선 개화파가 받은 충격은 단순한 기술 격차 이상의 것이었다. 사고방식, 제도, 국민 의식의 격차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며
일본의 근대화는 단순히 ‘문을 연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배경엔 사상 수용 태도, 실용 중심 학문, 유연한 외교 전략, 내부 개혁에 대한 자발성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그 일본을 통해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 두 나라의 19세기 선택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무엇을 배워야 할지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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