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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사회와 역사 관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청일전쟁 연결 고리, 그 흐름을 정리해보자

by 코스티COSTI 2025. 6. 14.

시작하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민중 반란이 아니었다. 탐관오리의 수탈에 맞선 분노, 유교적 정의감, 그리고 외세에 대한 공포가 섞여 조선을 흔들었고, 결국 청일전쟁이라는 국제적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고부봉기부터 전주성 함락, 청과 일본의 개입까지 동학의 전개 과정을 하나씩 짚어본다.

 

1. 고부봉기의 시작, 왜 민란은 폭발했는가

(1) 조병갑의 수탈, 어디까지 갔는가

1894년 1월 고부에서 봉기가 시작된 배경은 조병갑이라는 군수의 악행 때문이었다. 조병갑은 민중에게 이중과세와 강제 징수, 그리고 노동력 착취까지 서슴지 않았다. 전봉준은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 폐답, 즉 농민에게 재배권을 준 황무지를 개간하게 해놓고는 다시 세금을 징수
  • 구목(오래된 나무)을 도벌하여 보를 쌓으면서도 보상 없이 강제 노동
  • 아버지 기념 비각 세운다며 민간에게 1,000냥 이상 징수
  • 상납용 쌀을 사들일 때는 값싸게, 농민에게 징수할 때는 값비싸게

이런 수탈은 고부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이 전봉준의 증언이다.

(2) 전봉준은 왜 지도자가 되었나

전봉준은 자신이 먼저 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수천 명의 농민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자신을 추대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문자를 거칠게나마 해득하는 정도”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가 문자를 아는 소수의 선비였다는 사실은 민중이 그를 지도자로 삼은 배경이기도 했다.

 

2. 동학과 유교의 경계에서 흔들리다

(1) 전봉준은 동학도였을까?

전봉준은 어느 기록에서도 자신이 동학 교도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는 유교적 정의감에 따른 행동을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호남 지역은 동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정부의 진압 논리가 동학 색출에 집중되면서 전봉준도 자연스럽게 동학과 연계된 인물로 분류되었다.

(2) 포고문 속에 담긴 유교적 논리

전봉준이 발표한 무장포고문에는 유교적 가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다”
  • “포악한 정치는 날로 심해가고, 군신·부자·상하의 윤리가 무너졌다”
  • “도덕과 인륜을 바로 세우겠다”

이는 단순한 종교 운동이나 반란이 아닌, 유교적 명분을 기반으로 한 정치개혁의 외침이기도 했다.

 

3. 전주성 함락과 조선 정부의 혼란

(1) 정부군은 왜 연패했는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농민군 4,000명은 정부군 700명을 격파한다. 정부군은 근대식 무기를 갖췄지만, 실제로는 훈련도 지휘체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이미 정규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는 평가도 있다.

(2) 전주성 함락 이후, 상황은 국제 문제로

1894년 5월 30일,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다. 그 순간부터 동학운동은 단순한 내정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 조정은 외국 세력의 도움 없이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청군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4. 일본이 움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 텐진 협약(1885): 조선에 한 나라가 군대를 보낼 경우 다른 나라도 통보하고 동시에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합의
  • 스기무라 보고서: 일본 대리공사는 전주성 함락 직후, 조선 정부가 청군 요청을 한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에 먼저 보고

→ 일본은 이 보고서를 근거로 즉시 군 파병을 결정하고, 조선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한다.

 

5. 청일전쟁의 문턱에서 벌어진 결정들

(1) 조선 정부의 외세 요청, 너무 늦었다

조선 조정은 6월 1일 청병 요청을 결정하지만, 실제 문서는 6월 3일에 전달된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군사행동을 개시한 상태였다. 조선의 느린 결정과 혼란은 일본의 선제 개입을 허용하게 만든 셈이다.

(2) 일본 내부 정치의 변화도 동학과 맞물렸다

동학운동이 확산되던 시기, 일본은 김옥균 암살 사건 처리와 관련된 비판 여론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었다. 전주성 함락 소식과 청군 파병 요청은 일본 정부에 정권 결집의 기회가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이라는 강경책을 동시 추진하게 된다.

 

마치며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농민 반란이나 종교적 탄압 사건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내부의 부패, 외부의 침략, 유교적 명분, 종교적 이상이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을 뒤흔들었고, 동아시아 질서를 바꾸는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는 언제나 여러 갈래의 선택과 갈등이 엮여 이루어지며, 전봉준이라는 인물은 그 중심에서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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