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퇴근길에 유튜브를 켰다가, 자본시장연구원의 신보성 선임연구위원이 출연한 인터뷰 영상을 끝까지 보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경제학자 이야기 또 어렵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듣다 보니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있었다. 숫자와 이론으로 시작했지만, 그 안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안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는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이유는, 돈의 양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한 문장이 머리에 오래 남았다. 인플레이션, 금리, 자산가격 같은 거창한 용어보다 훨씬 단순하다. 돈이 너무 많아졌다. 문제는 그 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였다.
은행이 대출을 늘릴수록 세상엔 새 돈이 생긴다
나는 대출을 받을 때 은행 직원이 내 통장에 금액을 ‘입력’하는 순간을 본 적이 있다. 실제 현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숫자가 찍히는 걸 보며, 그게 진짜 돈이 되는 구조라니 묘했다. 신 연구위원의 설명은 그 장면을 정확히 짚었다.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지폐는 전체 통화의 극히 일부일 뿐이고, 나머지는 은행이 대출을 통해 만들어낸 예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통장으로 사고팔고 하는 돈의 대부분은 사실 ‘부채’에서 출발한다.
이 메커니즘이 문제인 이유는, 대출이 실물 경제보다 빠르게 늘어날 때다. 기업이 성장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보다 돈의 양이 훨씬 더 빨리 불어날 때, 그 차이는 결국 자산 가격에 쏠린다. 부동산과 주식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 증거다. 월급은 제자리인데 아파트 값은 하늘로 치솟았다.
신용 팽창은 결국 폭발한다
경제사는 반복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신용이 팽창할 때마다, 일정 시점이 지나면 수축이 찾아왔다. 그게 바로 금융위기다. 18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거의 10~20년 주기로 위기가 반복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20년은 이상하다. 신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도 위기가 오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중앙은행과 정부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팬데믹 이후 중앙은행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돈을 찍어냈다. 신 연구위원의 표현대로 “6년 동안 찍어낸 돈의 규모가 이전 50년간 찍어낸 총량의 네 배”였다. 그 돈이 다시 은행을 거쳐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통화량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그 시기를 뚜렷이 기억한다. 금리가 0%였던 그 몇 년 동안,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대출을 끼고 집을 사고 주식을 샀다. 돈을 빌리지 않으면 뒤처지는 세상이 됐다.
돈을 더 찍는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현대통화이론(MMT)이라는 개념이 있다. ‘국가는 화폐를 발행할 수 있으니 파산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듯해 보였다. 그런데 신 연구위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정부도 결국 부채가 지나치면 파산한다. 실제로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 사례다. 돈을 무한히 찍어내면 잠시 경기는 부양될지 몰라도, 결국 그 돈의 가치가 무너진다.
요즘 미국 정부의 국채 이자 비용이 국방비를 넘어섰다는 사실도 그는 짚었다. 국채 이자만으로도 국방비보다 많다는 말은, 결국 이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달러가 기축통화라서 버티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부채 위에 서 있는 경제라는 것이다.
끝없이 오르는 자산, 식어가는 근로의욕
나는 직장에서 점점 묘한 변화를 느낀다. 회식 자리에서 일 얘기보다 주식과 부동산 얘기가 더 많아졌다. 지하철 안에서도 휴대폰으로 주가를 확인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신 연구위원은 “사람들이 본업보다 재테크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사회”라고 했다. 공감이 갔다.
근로의욕이 줄어드는 건 개인의 태만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산 가격 상승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노동의 가치는 희미해진다. 그 결과 양극화는 더 커진다. 자산을 가진 사람은 더 부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평생 그 간극을 좁히기 어렵다.
이 격차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분노로 번진다. 정치가 극단으로 쏠리고, 중간이 사라지는 현상이 그 증거라고 했다. 실제로 요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극단주의 정치의 부상은 경제 불균형과 무관하지 않다.
인공지능 혁명도 부채를 없애지 못한다
AI의 발전이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높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다.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부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부채는 누군가의 채권이다. 갚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AI로 인해 생산 비용이 낮아지면 오히려 물가가 떨어지고, 디플레이션이 심해질 수 있다. 물가가 하락하면 부채의 실질 부담은 더 커진다. 즉, 기술 혁신이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부채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핵심은 은행 제도다. 지금 은행은 예금을 받아 대출을 하는 게 아니라, 대출을 통해 예금을 ‘만든다’. 이 체제를 유지하는 한 부채는 끝없이 불어난다.
신 연구위원이 제시한 해결책은 간단하지만, 동시에 가장 어렵다. “저축이 선행되고 난 뒤에만 대출을 해 주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즉, 실제로 누군가의 저축이 있어야만 돈이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용 팽창의 속도가 실물 경제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 개혁은 정치적 저항이 크고, 전 세계가 동시에 움직이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부채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남았다.
결국 우리는 모두 ‘부채로 만든 세상’ 안에서 살아간다. 집을 사고, 학자금을 내고,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빚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신 연구위원의 말처럼, 지금의 체제에서는 개인이 부채를 지는 게 오히려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합리의 총합이 사회 전체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깊다.
나는 요즘 소비를 조금 줄이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부채를 갚는 일이 내 삶의 작은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결국 중요한 건 빚보다 덜 흔들리는 마음 아닐까.
※ 이 글은 개인적인 관찰과 경제 전문가의 발언을 바탕으로 한 이해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투자나 재정 의사결정에 대한 조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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