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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왜 봉기했을까? 교조 신원 운동부터 청일전쟁 전야까지

by 코스티COSTI 2025. 6. 21.

시작하며

동학은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최제우를 기리는 신앙에서 시작돼, 국가의 부당한 탄압에 맞선 집단 저항으로 발전했고, 결국 조선 말기 최대의 민중 봉기로 이어졌다. 그 출발점부터 전국적 확산, 그리고 조선 조정을 자극해 청일전쟁의 촉매로까지 이어진 과정에는 단순히 ‘난’이라 보기 어려운 입체적인 배경이 깔려 있다.

 

1. 동학이 처음 탄압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였고, 당시로선 생소하고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특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핵심 교리는 유교적 질서와 상반됐다. 하지만 최제우의 죽음 이후부터 동학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다.

(1) 탄압이 확산의 계기가 된 이유

최제우가 1864년 처형되면서, 동학은 오히려 더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경주 지역에 머물던 소규모 종교였지만, 박해가 시작되자 신도들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으로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 경상도 → 강원도 영월 (이경화 유배 이후)
  • 충청도 → 이필제의 포교 및 무장 봉기 시도
  • 전라도 → 1890년대 이후 주요 기반지로 자리잡음

즉, 정부의 박해는 동학을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지하화’와 ‘확산’을 동시에 촉진시켰다.

(2) 왜 천주교와 혼동되었을까

조선 조정은 동학과 천주교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둘 다 외부로부터 들여온 사상처럼 느껴졌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며 전도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유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 신부 베르네 주교의 보고서에는 “동학과 천주교가 함께 탄압을 받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 동학의 조직화와 재건: 해월 최시형의 전략

해월 최시형은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단순히 신앙을 이어받은 것을 넘어서 조직과 경전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1) 구전 사상을 경전으로 만든 방식

다음은 해월이 남긴 대표 경전들이다:

  • 《동경대전》: 교리 중심
  • 《용담유사》: 시가 형태로 동학 사상 전파

이 책들은 모두 해월이 구술한 내용을 다른 제자들이 필사한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플라톤의 저작으로 남았고, 예수의 말이 사도 바울의 편지로 정리된 방식과도 유사하다.

(2) 제사와 예법을 통한 공동체 결속

해월은 동학 교도들의 결속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기념일과 예식을 제정했다.

  • 음력 3월 10일: 교조 최제우의 순교일
  • 음력 10월 28일: 탄신일
  • 4월 5일: 대도승통일일 (교리 통합 기념일)

이런 행위는 기독교의 부활절, 성탄절처럼 교회력을 구성하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3. 동학의 무장 봉기: 이필제의 독자적 노선

해월은 온건하고 조직 중심이었다면, 이필제는 행동 중심이었다. 그는 교조의 명예 회복과 사회 개혁을 위해 무장 봉기를 시도했다.

(1)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필제는 반복적으로 봉기를 시도했으나 다음과 같이 모두 실패했다.

  • 1869년 진천 작변: 계획 단계에서 밀고로 실패
  • 1870년 진주 작변: 병영 습격 시도 실패
  • 1871년 영해 공격: 500명 동원했지만 실패, 결국 체포되어 능지처참

이필제는 동학 내부에서도 과격파로 여겨졌고, 최시형은 계속해서 그를 말리려 했다.

(2) 봉기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이필제는 동학을 단순 종교가 아닌 정치적 해방 운동으로 인식했다. 그가 보낸 통문에서 드러난 의도는 다음과 같다:

  • 스승의 명예 회복
  • 백성의 고난 구제
  • 중국 정세 변화에 맞춘 창업 논리

 

4. 조정과 동학, 갈등이 본격화되다

1880년대 후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사라졌지만, 동학은 여전히 ‘사교’로 몰려 있었다. 이에 따라 동학 교도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결국 집단 행동으로 이어졌다.

(1) 공주, 전주, 서울에서 시위가 벌어진 이유

대표적인 실력 행사는 다음과 같다:

  • 1892년 공주 시위: 관찰사 조병식에 대한 단자 제출
  • 1893년 광화문 교조 신원 규탄 상소: 40명 동학도 한양 진출, 군걸 앞 시위

이런 행동은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과거 응시생으로 위장해 입궐한 사건은 정치적 도전으로 인식됐다.

(2) 벽보 사건과 외세 배척 논란

1893년 3월, 서울 정동의 서양 선교사들 집과 학교에 벽보가 붙었다. 이 벽보는 천주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서양 종교의 타락성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동학 교도들이 썼다고 보긴 어렵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동학의 척사 노선으로 해석됐다.

 

5. 왜 동학은 폭발적인 봉기로 이어졌는가

이제 조정은 동학을 더 이상 단순한 종교로 볼 수 없었다. 실제로 동학은 천주교와 달리 반정부, 반서양 세력으로 인식됐고, 정통 사대부층 역시 강하게 반대했다.

(1) 관의 회유에도 동학은 멈추지 않았다

어윤중이 파견돼 해산을 권유했지만, 동학 교도들은 이를 거부했다. 고부에서 민란이 터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2) 유교, 천주교, 조정, 동학… 모든 것이 충돌하다

조선 후기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다음과 같다:

  • 조정: 동학은 반체제 사교
  • 사대부: 유교 전통 위협
  • 천주교: 동학과 구별되려 애씀
  • 동학: 명예 회복과 종교 자유 요구

결국, 고부 민란을 계기로 동학은 봉기로 전환되고, 진압 과정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된다.

 

마치며

동학은 단순한 종교 운동이 아니었다. 조선 말기의 정치, 사회, 종교 갈등이 응축된 복합적인 운동이었고, 그 중심에는 해월 최시형 같은 조직가와 이필제 같은 행동가가 있었다. 탄압과 확산, 온건과 과격, 종교와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결국은 동아시아 전쟁의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19세기 말 조선의 민중과 지배층, 종교와 국가, 내부와 외부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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