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출산율은 줄고 있지만, 일본의 소비는 오히려 젊어지고 있다.
단순한 고령화를 넘어선 ‘소령화’(消齡化)라는 흐름은 세대 구분을 무너뜨리고, 취향 중심의 시장으로 소비 구조를 바꿔가고 있다. 디지털과 레트로, 그리고 ‘재생’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지는 이 변화는 저출산 이후의 한국이 직면할 미래와도 닮아 있다.
1. 일본의 저출산이 시장을 바꿨다는 말, 실감이 갔다
아이를 한 명만 낳는 시대. 소비도 그에 맞춰 바뀌기 시작했다.
한때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던 가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한 명’에게 집중하는 소비가 당연해졌다. 내가 일본 관련 사업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도 이 변화였다.
🌱 한 명에게 집중하다 보니 생긴 변화들
- 육아용품의 고급화: 예전엔 내구성과 가성비를 따졌다면, 지금은 "좋은 걸 한 번에" 쓰자는 분위기가 강하다. 유모차부터 아기 침대까지 브랜드 제품 선호도가 높다.
- 디지털 장난감 시장 확대: 예전 장난감 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디지토이먼트(Digitoyment)’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있다. 실제 부모 목소리를 학습한 AI 그림책 장난감도 등장했다.
- 육아 플랫폼으로의 전환: 기저귀 회사 ‘메리즈’는 단순히 기저귀만 파는 것이 아니라, 출산부터 육아까지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단순히 출산율만 보는 건 이제 무의미하다. 누가 아이를 낳고, 언제 낳고, 어떻게 키우는지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2. 고령화가 아니라 ‘소령화’, 이 개념이 뭐길래?
세대가 아니라 ‘취향’으로 소비를 묶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소령화(消齡化)’라는 개념이 일상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은 고령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흐름이다.
🧠 “이건 어떤 세대가 쓸까?”가 의미 없는 이유
- 슬램덩크의 재개봉 사례: 원작 세대인 40~50대는 물론이고, 이제 막 만화를 접한 10대까지 영화관에 갔다. 소비층이 나이로 구분되지 않고, ‘슬램덩크를 좋아하느냐’로 묶인다.
- 햄버거를 좋아하는 60대?: 1992년엔 햄버거를 좋아한다고 답한 60대가 20%였지만, 2022년에는 50%를 넘는다. 취향이 연령대를 가로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 편의점 주 이용층의 변화: 예전엔 20대가 주 고객이었지만, 지금은 40~50대가 메인이 되었다. ‘젊은이의 공간’이던 편의점이 중년의 생활 플랫폼으로 바뀐 것이다.
세대 간 소비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소령화는 바로 이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나이가 아니라 가치관과 취향이 소비를 이끄는 시대라는 뜻이다.
3. 이게 궁금했다: 그럼 전통 브랜드들은 어떻게 됐을까?
기존의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일본을 대표하던 브랜드들도 이 새로운 흐름 앞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왜 시세이도와 와코루는 고전하고 있을까?
| 구분 | 기존 전략 | 실패 요인 |
|---|---|---|
| 시세이도 | 백화점 중심 고급 화장품 | 젊은 세대는 한국 화장품 선호, 유통망도 달라짐 |
| 와코루 | 각선미 강조 속옷 | 젊은 세대는 기능성, 심플한 속옷 선호 |
| 공통점 | 오프라인 고가 전략 | 온라인/모바일 기반 쇼핑 트렌드에 뒤처짐 |
이 브랜드들이 내놓는 상품은 여전히 좋지만, 더 이상 백화점에 가지 않는 소비자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4. 소비자는 줄었는데, 시장은 더 다양해졌다?
아이 수는 줄었지만, 인형 시장은 2배가 됐다. 2022년 일본 인형 시장은 약 3,200억원 규모로, 10년 전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 인형을 사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다
- 인형 여행 서비스 ‘우기우기’: 고령자나 1인 가구가 인형을 여행 보내고, SNS로 인증샷을 받는다. ‘여행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마음’을 인형이 대신 풀어주는 것이다.
- 소비자는 연령이 아니라 ‘마음’이다: 외로운 마음, 정서적 위로, 일상 속 취향... 소비의 이유는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인구가 줄면 시장도 작아진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5. 일본 유통 시장, 누가 살아남았을까?
취향 중심 시장에서는 ‘누구를 위한 가게냐’가 중요하다. 일본의 유통 구조도 이 흐름을 따라 빠르게 바뀌고 있다.
🏪 연령 무시, 지역 특화... 이게 통했다
- 동키호테, 로피아, 오케이: 모든 연령대가 만족할 만한 상품 구성을 갖추고, 가격도 싸고, 다양성도 확보한 매장으로 인기.
- 지역 밀착형 슈퍼마켓들: 전국 체인보다 지역 취향에 맞춘 슈퍼마켓이 오히려 성장 중. 군마현처럼 인구 7,000명인 지역에서도 그 지역 음식만 집중해 매출 초과 달성 사례 다수.
- PB제품도 이제는 ‘싼 맛’만으로는 안 통한다: 품질과 디자인을 포함한 ‘취향형 PB’로 진화 중이다.
지금 일본에서 살아남는 브랜드는 ‘덩치’보다 ‘센스’가 좋다. 이건 한국 유통 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6. '리코노미' 시대, 우리도 준비해야 할 때다
다시 쓰고, 다시 사고, 다시 연결되는 소비. 일본에선 이제 ‘중고’가 더는 부끄러운 소비가 아니다. 오히려 트렌드에 가까워졌다.
♻️ 일본이 보여준 ‘다시 쓰는 경제’ 흐름
- 유니클로, 중고 리유즈 사업 본격화: 브랜드 자체적으로 중고 플랫폼에 진입했다.
- 야마다덴키, 중고 가전 판매 시작: 중고제품도 품질 보증을 포함한 ‘합리적 소비’로 포지셔닝.
- 중고가 패스트패션보다 두 배 커질 전망: 글로벌 조사기관에 따르면, 2030년엔 중고 의류 시장이 패스트패션의 2배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취향과 윤리의식이 소비를 재정의하고 있다. 한국도 머지않아 이 흐름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마치며
나이와 세대 중심의 소비는 끝났다. 이제는 ‘누가 몇 살인가’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가 더 중요한 시대다. 일본이 먼저 겪은 이 소령화 흐름은 한국 사회와 시장에도 곧 도착할 시그널이 될 것이다.
취향이 중심이 되는 시대, 우리는 어떤 상품을 만들고,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 이제는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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