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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사회와 역사 관련

원나라 제도를 그대로 들여온 왕, 충선왕은 왜 위험한 인물로 기록됐을까

by 코스티COSTI 2026. 1. 1.

조용히 시대의 균열이 시작됐다.
고려의 26대 왕, 충선왕은 단순히 개혁적 군주로 남기엔 너무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의 중심을 스스로 옮겼고, 문화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었다. 덕분에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개방적인 왕’이지만, 당시 신하들의 눈에는 ‘국가의 틀을 흔드는 위험한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내가 흥미롭게 느낀 건, 충선왕의 변화가 단순히 원나라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황실의 외손자, 원 황제의 부마로 자란 그는 태생부터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 자신감이 정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왕위보다 더 큰 세계를 본 사람

젊은 충선왕은 이미 스무 살대에 고려 정치의 판을 바꿔 보려 했다. 단 8개월간의 재위였지만, 그가 보여준 움직임은 그 나이로선 놀라울 만큼 크고 과감했다. 이후 원나라의 실력자로 성장했을 때도 ‘고려의 왕’이라는 위치에 머물지 않았다.
“나는 왕위로는 부족하다”
이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듯, 그는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원나라 수도로 향했다. 정치의 중심이 고려가 아니라 원이라 믿었던 인물. 이 태도 하나만으로도 이전 왕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원나라 문화를 그대로 들여오다

충선왕의 개혁 중 가장 상징적인 건 ‘문화 수용’이다.
그전까지 고려는 가능한 한 원의 문화를 거부하며, 고유한 질서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충선왕은 달랐다.
“그거 원에서는 그렇게 하던데?”
그가 한마디 하면 제도의 뿌리까지 흔들렸다.

 

예를 들어 호적 제도를 원식으로 바꿔 군인과 민간인을 분리하려 했던 일. 고려에는 군민을 따로 나눈 적이 없었다. 신하들은 나라의 군사력을 원에 노출할까 두려워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흥미로운 건, 반대가 심하자 “그래, 그럼 그만두지 뭐”라며 쉽게 물러섰다는 점이다.
깊이 계산한 개혁이라기보다, 원의 제도를 흥미롭게 여긴 ‘실험’에 가까웠다.

 

한 글자 바꾼 제도, 나라의 질서가 뒤집히다

1308년, 왕위를 물려준 뒤 보기를 하던 충선왕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왜 고려는 왼쪽이 더 높지? 원에서는 오른쪽이 높은데.”
그 말 한마디에 나라의 서열 체계가 바뀌었다. 좌정승보다 우정승이 더 높게 된 것이다. ‘상좌(左)’였던 전통을 ‘상우(右)’로 바꿔버렸다.
글자 하나의 변화였지만, 그로 인해 관직 인명장과 명함, 모든 기록이 다시 써져야 했다. 행정적 혼란은 물론, 국가 질서의 상징이 완전히 뒤집힌 셈이다.

 

왕실의 혼인 풍속까지 바꾸다

충선왕의 개혁은 단지 행정에 그치지 않았다.
고려 왕실의 오래된 혼인 풍속, 즉 근친혼을 스스로 금지했다.
그 전까지는 원나라의 간섭에도 “이건 우리 풍속이니 바꿀 수 없다”라며 버티던 전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통을 ‘옳지 않다’며 먼저 버렸다.
이때부터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며 ‘재상지종’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충선왕의 시대 이후 고려의 최상층 가문은 그 명단으로 정리됐다.
이 한 결정이 고려 귀족 사회의 판을 갈라놓았다.

 

황제의 임명장을 받으려 했던 위험한 시도

충선왕의 개방적 태도는 점점 더 위험한 방향으로 향했다.
가까운 측근들이 제안했다.
“도평의사사 관직은 고려 왕이 아니라 원 황제가 임명하게 하면 권위가 올라갑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좋네”라며 실행하려 했다.

 

만약 그 제안이 그대로 이뤄졌다면, 고려의 최고 행정기관이 더 이상 ‘고려 왕의 기관’이 아니게 된다. 신하의 임명권이 원 황제에게 넘어가면, 왕의 권한은 형식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신하들이 필사적으로 막아 결국 무산됐지만, 이 시도는 충선왕이 어떤 위험한 선까지 건드렸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자신감이 만든 균열

충선왕은 단순히 원에 굴복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원의 중심으로 들어가 ‘승자의 위치’에서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만큼 자신이 가진 권력이 강했기에 가능했던 선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신감이 고려라는 나라의 안전망을 허물었다는 점이다.
불개토풍 — 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는다는 세조의 약속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미 원나라 제국 질서 속에서 ‘더 큰 정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충선왕은 개혁가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군주였다.
그의 시도는 국가의 틀을 흔들었지만, 그 시대를 한 발 앞서 나간 감각이기도 했다.

 

오늘 우리가 그를 평가할 때

그는 매국노였을까, 아니면 시대를 읽은 개혁가였을까.
이 두 평가는 여전히 충돌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고려의 경계를 확실히 흔들었고,
그 균열은 이후 고려 정치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것.

 

그가 남긴 흔적은 지금 봐도 참 흥미롭다.
권력의 중심을 옮긴 왕, 시대의 질서를 새로 쓰려 했던 인간 충선.
그의 선택이 옳았는가의 문제보다, 그가 ‘왜 그렇게 봤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 이 글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개인적 해석 콘텐츠로, 특정 학설이나 시각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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